미국인이 제게 친절했던 것은 경쟁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편했던 것은 이들에게 내가 완벽하게 열외였기 때문이구나.’

어릴 적부터 좀 독특하긴 했습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였거든요.
가족 휴가로 강원도 바다에 놀러가서
해변 파라솔 밑에서 학습지를 풀곤 했지요.
아무도 안 시키는데, 취미처럼요. 초등학생이.
학교 성적도 자연히 좋았습니다.
5학년까지는 전과목 올백이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상장을 받았고
영재반 수업을 들었고요.
그러나 영재반 수업은 주로 수학, 과학인데
저는 암기를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영재반에서는 둔재에 가까웠습니다.
게다가 워낙 좀 생김새도…
전교 1등같지 않거든요.
반에서 한 40등 하며 놀러다니게 생겼달까.
그렇다보니 컨닝을 한다 뒷 배경이 있다 등등
억울하고 골치아픈 음모론에도 시달리고
반에 잘나가는 아이들에게 미움도 받았습니다.
공부 잘 하니까 반장 하라며 뽑아놓고는,
말도 전혀 듣지 않았고 말입니다.
내가 뭘 잘하는 것을
남들이 납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오해를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게다가 성적으로 주는 졸업 장학금은,
저보다 잘하는게 영어 말하기와 체육 뿐인,
절 시기하던 친구가 받았습니다.
종합 성적이 제가 훨씬 좋았는데도 말입니다.
선생님은 그 날 아침 어머니에게
정말 죄송하다 전화를 했고, 그 뿐이었습니다.
미움받고 상처받고, 그 끝엔 보상도 없었던거죠.
그래서 중학교 때 부터는 서서히
공부를 좀 내려놓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미술 대학으로 진로를 잡게 되니
친구도 많이 생기고 인기도 많아지더군요.
안타깝게도 공부에 비해 그림을 못 그려서
인생이 훨씬 더 힘들어진 감이 있었지만 (…)
이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로 얻는 성취감과 지위보다
소속감이 더 중요했던 것이죠.
미국에 오니 더욱 자유롭다고 느꼈습니다.
다들 친절했고,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영어도 못하고 어리버리한 젊은 한국 여성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미국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만큼 역으로 저는 편안하다고 느낀 겁니다.
그 의미를 모른 채 십 여년을 해맑게 지내다가
뉴욕 백인 중심 대기업 디렉터가 되고나서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편했던 것은
이들에게 내가 완벽하게 열외였기 때문이구나.’
여러 회사 내부 사정으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존재는
“나보다 잘될 것 같아 보인다.”라는
근거 불충분한 이유로 저여야만 했고
그렇게 일개미는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1의
알리와 상우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상우는 빚에 눌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상황이 안좋아 보이는 알리에게
돈을 조금 주는 등 선의를 베풉니다.
하지만 정말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오자
알리를 속여 죽이고 게임에서 승리합니다.
전 알리를 보며 정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도 떠올랐습니다.
비슷한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이제는 어른인데
또 내가 잘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서
열심히 버텨보았습니다.
겸손함, 모르는 척 등은 소용없었습니다.
약한 부분이 보이면 바로 뚫고 들어왔거든요.
타협과 꼼수 없이,
실력으로 모든 공격을 전면 방어하였습니다.
실력으로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그러면 된다고들, 그러길래.
많이 이겼고, 단 한 번도 꿇지 않았고,
결국엔 일부 인정도 받았지만,
결론적으로 미국이나 한국이나
초등학교 때나 뉴욕 대기업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이젠 정말 뭘 그렇게 대단히
잘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결국엔 “누가 누구를 아느냐”
“누가 누구의 마음에 드느냐”가
실력보다 중요한 사회인 것 같습니다.
실력은 내 것으로 한결같지만
마음은 갈대와 같은데,
갈대가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두는 것은 싫습니다.
처세는 더 좋아졌습니다.
나의 적이기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기대하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단지 내 곁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다른 재미있어 보이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저를 찾아내는 것,
찾아온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람있고 기쁩니다.
서로의 편이 되어 응원하는 관계가 소중합니다.
그래서 또 희망을 가져봅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이 진정 필요한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을거라고.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충분히 잘해도
괜찮은 날은 온다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순환으로 성장하는 관계,
노력해보겠습니다.
응원해 주신다면 희망이 있는 거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