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술을 따라다니다 보니 궁금해지는 건 본질입니다.
혁신의 기준점이 바뀌는 AI 시대,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할 가능성은 무엇일까요?

뉴욕 SVA 디자인 학부 시절 가장 핫한 신기술은 동영상, 모션그래픽 분야였습니다. 새로운 것이 좋아 시작했고 금방 사랑에 빠졌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HD 비율의 TV가 세상에 등장했기에 제 포트폴리오는 거의 SD 포맷입니다.
코딩, 3D, 의미있는 내러티브 등을 이용한 인터랙티브 아트가 핫해질때쯤 뉴욕 Parsons 대학원에서 정확히 그것을 배웠습니다. 너무나도 재미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저와 잘 맞는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개발자 및 3D 전문가들 연봉이 팍팍 오르는 것을 구경만 하며 모션 디자인 업계에 잔존했습니다.
대신 브랜딩/기획 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이제까지 경험했던 과거의 분야,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분야를 엮어 디자인의 일부로 접목시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뉴욕 방송국에서 브랜드 크리에이티브를 주도할 적, AR, QR 코드 등을 가상으로 구현하는 아날로그 감성 브랜드 캠페인을 기획한 것 등이 좋은 예가 됩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지만, 혼자 다 하기에도 그렇다고 함께 하기에도 기술력을 채울 수가 없었던 부분들을 제 주력 도메인의 기술로 메꾸어 여러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던 셈이죠.
AI는 이제까지의 신기술 중 가장 반갑습니다. 최소한의 자원 소모로 부족한 기술력을 메꾸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의적인 실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거의 무한대로 열어줍니다.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혁신의 정도가 파괴적이라, 기존의 체계와 전통이 진화한다는 표현보다는 무너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파도가 올 때 좀 제대로 올라타서 시원한 바람을 느껴보고 싶다고 소망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AI가 건드리지 못하는 본질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생깁니다.
디지털 과도기. 세계가 전복될 수 있는 속도와 규모의 혁신의 끝은 결국 본질로의 더욱 심도있는 회귀가 아닐까 끊임없이 상상하게 됩니다.
매일같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공책에 일기를 쓰고 아이디어를 담던 아날로그 시절을 기억합니다. 이를 대체할 수많은 디지털 도구들이 생겨났지만 좀처럼 100% 대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만가지의 노트 앱이 등장해도 종이와 펜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AI는 인간으로 하여금, 조금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본질적인 것에 투자할 여력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의미있는 작품은 불편하고 어려운 것에서 탄생하니까요.인류가 지적 허영을 충분히 채울 때 세상이 다채로워지지 않을런지.
